해나무
만안교 탐방 본문
오늘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왔습니다.
1365.go.kr를 통해 지역 검색을 하여 맞는 봉사활동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참가한 봉사활동은 안양 역사 알기와 안양천 정화활동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안양 석수동에 있는 만안교였습니다.
만안교 앞에 있는 만안교 비에 유형문화재 제38호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선 만안교의 모습을 한 번 보시죠.
오늘 만안교 역사해설을 해 주신 분입니다.
만안교에 대해 한 번 알아보시죠.
저 깨알만한 글씨 잘 보이시나요?
만안교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인 정조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정조임금의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다들 아시죠?
아버지 영조임금이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임금에 오른 후 화성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화성으로 원행을 가게 되는데
처음에는 노량진을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 인덕원으로 거쳐 화성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지금은 잘 닦인 길을 차로 다녀 잘 모르지만
그 당시 남태령은 험난한 고갯길이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길을 바꿔 시흥고개를 넘어 안양을 통과하는 길로 바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양천이 원행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주위 백성에게 부역을 시켜 임시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넜습니다.
매번 다리를 놓고 원행이 끝나면 철거를 하다보니 백성이 노역이 심했습니다.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사람도 거의 없었던 때였죠.
그래서 영구적인 다리를 놓기로 하였습니다.
만안교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하였습니다.
만안교 건설 기록이 담긴 비문입니다.
크게 만안교라서 써 있습니다.
비 아래에는 거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거북 머리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인 용머리네요.
비 뒷면에는 당시 만안교 건설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거북 뒤를 보면 돼지꼬리처럼 말린 거북이 꼬리에서 조상의 해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만안교 다리 아래에 석문을 보면 그 모양이 아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아치모양의 석문을 홍예석문이라고 부릅니다.
홍예는 한자로 '虹霓'라고 쓰는데 '무지개'라는 뜻입니다.
한바탕 비가 내린 후 맑게 개인 하늘에 반원을 그리면 떠 있는 무지개를 본 떠 만든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만안교의 홍예석문은 모두 몇 개일까요?
왼쪽부터 세어 볼까요?
하나, 둘, 셋, ... , 일곱. 총 일곱 개입니다.
우리나라의 다리에 홍예석문이 일곱 개인 것은 만안교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수원 화홍문에 홍예석문이 일곱 개가 있기는 하지는 화홍문은 다리가 수문입니다.
이번에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다리의 돌 하나 크기가 위에서 보기보다 훨씬 커네요.
이런 다리를 3개월만에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수원화성 건립 당시에 사용한 기중기를 사용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과학기술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아치를 이루는 돌의 모양을 다듬은 것도 예술입니다.
현재 만안교가 위치한 곳이 석수동인데 지금은 돌 석(石)에 물 수(水)자를 쓰지만
당시에는 물 수(水)가 아니라 손 수(手)자를 썼는데
석수동에 돌이 많았으며 또한 이 돌을 다루는 석공들이 많아 그랬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지금의 안양예술공원 자리에 안양유원지가 생기고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석수(石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다리 기단부분을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여름철이 지나 비가 내리지 않아 하천이 말라 있지요.
물이 흘러오는 상류부분을 보면 그냥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세모꼴로 깍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상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다리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유선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심한 것까지 생각하여 만든 조상의 지혜를 보게 됩니다.
만안교 탐방은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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